2011년 7월 3일 일요일

日 젊은이의 '정신적 지주' 도보여행가 후지와라 신야, 대지진 100일後를 말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01/2011070101219.html?hotnews_txt

지난 3월 11일 오후 2시 도쿄. 교통체증으로 멈춰 선 그의 자동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린더 고장인가 했더니, 앞차도 심하게 요동쳤다. 머리 위 고가도로도 양옆으로 휘청거렸다. 지진(地震)이었다. 대지진 직후, 그는 자동차에 생수를 싣고 재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은 참혹했다.

고베대지진(1995) 때도 구호 현장에 있었지만 이 정도로 끔찍하진 않았다. 그는 분노했다. "그곳엔 신(神)도, 도깨비도 없었다." 그로부터 100일이 지난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지진은 일본에 축복이 될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67). 일본 젊은이들의 구루(guru, 스승)로 추앙받는 여행가이자 사진계의 거장이며 일본 권력자들이 미워하는 저널리스트다. 그의 첫 저서인 '인도방랑'(1972)은 일본에 '인디아 붐'을 일으키며 고도성장의 냉혈(冷血) 시스템에 갇힌 일본사회에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는 한국 대학가에 상륙, 해적판으로 읽혔다. 김홍희, 김별아, 김남희 등 수많은 작가들이 신야로 인해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했노라 고백했다.

인도에 이어 티베트방랑, 동양기행, 아메리카 기행을 펴낸 그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지닌 사상(思想)이 다르다"며 굳이 시력 약한 왼쪽 눈으로 사진을 찍는 괴짜이기도 하다.

일본 사회에 통렬한 비판을 쏟아내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도쿄표류'에 실린 갠지스강의 시체와 이를 뜯어 먹는 개의 사진, 그 밑에 적힌 "인간은 개에게 먹힐 만큼 자유롭다"는 글귀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했다 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간이 특별히 동물보다 위대한 점이 무엇인가."

후지와라 신야를 만나고 싶었던 건, 최근 출간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푸른숲)란 제목의 이 책은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에서 묵직한 감동을 길어 올리는 에세이다. 그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대중의 심장을 파고드는 글쟁이였다.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받고 위로받는다….' 지진해일이 덮치기 훨씬 전에 쓴 이 책은 일본 사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가는 중이다.

지난달 21일 도쿄 시부야의 작업실에서 신야를 만났다. 히피 혹은 기인(奇人)의 풍모이리라 예상했던 그는, 167㎝ 단신의 평범하고도 진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야(月夜)'. 3ㆍ11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일본 동북부의 재해현장을 후지와라 신야가 촬영했다. 지진과 해일로 폐허가 된 마을이 푸른 달빛에 젖어 있다. / 후지와라 신야 제공
神도, 도깨비도 없었다

―지진을 감지하고 처음 무슨 생각을 하셨나.

"고가도로가 어느 쪽으로 쓰러질까.(웃음) 그럴 땐 무조건 고가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황해서 바깥쪽으로 뛰면 도로에 깔리고 만다."

―침착하시다.

"오랜 여행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게 한다."

―지진 당시 개인전을 열고 있었다. 제목이 '죽지 마, 살아라'였다.

"자살하지 말자고, 우리 같이 살아보자고 젊은이들에게 절규하는 전시였다. 대지진으로 전시를 중단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움츠러들면 안 된다. 전시를 연장했다. 일절 팔지 않는 내 작품들을 팔기 시작했다. 수익금 전액을 지진 피해자를 위한 성금으로 기부했다."

―그런 다음 재해 현장으로 달려간 건가.

"이번처럼 엄청난 넓이의 땅을 덮친 것은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뒤 처음이었다. 고베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베지진 때는 고베라는 마을이 '남아' 있었다. 건물이 기울어졌거나 쓰러졌다 하더라도 고베는 고베였다. 이번엔 지명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딜 가도 똑같이 쓰나미로 엉망이 된 쓰레기더미뿐이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언어를 망각했다. 생각하는 게 나의 일인데, 대체 뭘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꿈같고 SF 같은 현실을 그냥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해 현장에서 구호활동과 함께 사진작업을 했다.

"처음엔 걷기만 했다. 걷다 보니 반쯤 무너진 집이 보였다. 집 앞에 나이 든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미야코라는 마을이었다. 잠깐 사진을 찍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집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더미 위에 물에 젖은 아이의 그림이 한 장 있었다. '미야코의 할머니에게'라고 쓴 글자 옆에 할머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제야 분노와 슬픔이 밀려들었다. 작고 평범한 일상을 한입에 삼켜버린 거대한 힘에 대해. 일본에는 '신(神)도 도깨비도 없다'는 말이 있다. 쓰나미란 그냥 물에 빠져서 죽는 게 아니다. 쓰나미가 밀고 오는 갖가지 물건들 틈바구니에 끼여 몸이 찢어지거나 잘려서 죽는다. 아이들의 시체를 보았다. 왜 죄 없는 아이들까지 잔혹하게 죽어야 하는지 분개했다. 그곳엔 신도 도깨비도 없었다."

명령 없는 민주주의

인터뷰하는 후지와라 신야. 그의 제자 마사타카 이시다가 촬영했다.
―5월에 '후지와라 웹매거진'을 창간했다. 방사능 측정기로 측정한 방사능 수치를 매일 공개하는 식으로 일본 당국을 몰아붙인다고 하더라.

"'국가'를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대지진이 준 또 하나의 데미지다. 처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있으면서도 국가는 국민들에게 '이겼다, 이겼다, 또 이겼다'고 속였다. 그때 솔직하게 '우리가 졌다'고 인정했다면 원자폭탄은 일본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같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누출된 방사선량이 체르노빌처럼 '레벨 7'이었다는 것을 정부와 도쿄전력의 인간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감췄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인체에 이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최근 1개월간 우리는 국가가 했던 말들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다. 국가의 거짓말로 수만 명이 방사능을 뒤집어썼다."

―간 나오토 총리의 리더십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의 가장 큰 실패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전된 나라다. 원자력 사고에 대비한 계측장치와 방어장비들을 어느 선진국보다 잘 갖추고 있다. 그 장치들을 사용했다면, 방사능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어디로 피난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작동해야 할 상황에서 계측장치를 사용하지 마라, 위험등급을 발표하지 말라는 모종의 힘이 작용했다. 대신 총리가 한 말은 '자주(自主)피난'이었다. 자기가 판단해서 피난하라는 얘기다. 전쟁 때는 적기가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피할 수 있지만, 방사능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다. 국가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시킨 비겁한 행위였다."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 나는 지적이다.

"현재 일본정치는 민의(民意)로 움직인다. 여론조사, 앙케트가 주도하는 정치의 시대다. 민주주의는 올바르지만, 과잉되면 지도자가 민의에만 의존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상처 때문에 일본에서 '명령'이란 말은 폭력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그러다 보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국면에 민주주의에서 생겨난 어설픈 사고들만 난무한다. 특히나 시민운동가 출신인 간 나오토는 '명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본인, 타인을 위해 울다

―피해 복구에 100년이 걸린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은 이번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까.

"쓰나미는 회복되고 있다. 방사능은 다른 문제다. 후퇴하거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쓰나미, 방사능 이상으로 우리가 안게 된 숙제는 앞으로 일본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 점에서 나는 이번 대지진이 마이너스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플러스 요인도 있다는 뜻인가.

"대지진은 국민들 가슴에 거대한 슬픔을 만들어냈다. 슬픔이란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태어난다.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울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쓰나미가 오기 전까지 일본은 무연사회(無緣社會)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독사라고 들어봤나. 지난 1월 NHK가 특집방송을 했을 만큼, 혼자서 살다가 혼자 죽는다는 고독사가 급증하고 있다. 급속한 고도성장이 치열한 경쟁을 낳았고, 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끊어 놓았다."

―이번 대지진이 사람들 사이의 끈을 다시 이어주고 있다는 말인가.

"일본은 불바다에서 시작한 나라다. 2차대전 후 거지상태에서 출발했고, 그 반동의 힘과 열망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최근 50년 동안 0(zero)에서 100 가까이 올라온 셈이다. 무리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살인적인 스트레스가 도사린다. 자살, 왕따, 가족해체, 고독사가 그 결과다. 이때 대지진이 발생했다. 유례없는 재앙을 겪으면서 일본인들은 타인의 슬픔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감성,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이 대지진으로 인해 분출된 것이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젊은이들이 구제활동을 위해 집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부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이 앞다퉈 모금 활동에 참가한다. 결혼, 가족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거야말로 축복 아닌가. 나는 일본 대지진이 한국과 아시아, 전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
매일 부서지고… 새로워지면서… 다시 살아갈 힘 얻어…
가이드북은 일종의 보험… 남의 체험 따라하는 여행… 놀라움 수반되지 않아

지기 위해 여행한다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대지와 바람은 거칠었다. 꽃과 나비는 아름다웠다. 나는 걸었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었다….<인도방랑> 중에서

후지와라 신야는 1944년 규슈 후쿠오카 현의 여관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집을, "매일매일 '안녕하세요?' 하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나가던 이상한 집"으로 추억했다. 덕분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인간의 양면성을 본 것도 그때였단다. "한번은 교장선생님이 교사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서 연회를 했다. 훔쳐보니, 고집불통에 엄격한 교장이 벌거벗고 춤을 추더라. 그도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웃음)" 고2 때 가업이 망하면서 신야는 그림에 빠져들었다. 무일푼이 되어 이사 간 동네에서 만난 수선화를 보고 붓을 들었고, 도쿄예술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재학 중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인도로 떠난다. 1969년, 스물다섯살 때였다.

―왜 인도였나.

"69년은 일본에서 전공투라는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화실에 처박혀 그림을 그릴 처지가 못되었다. 밖으로 뛰어나가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여행이었다. 구도(求道)하고 싶었다."

―뜻을 이루셨나.

"처음 인도에 가서 사막을 2㎞쯤 걸었다. 현지 관리에게 돈을 주고 여기서 저기까지 걸었다는 증명서를 만들고 발자국 사진까지 찍었다. 일본에 가져가 전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득 '아트(art)'라는 게 어처구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더라. 종잇장은 찢어버리고 자유롭게 여행했다. '살아 있는 인간'들을 만났다. 인간이란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숭고하거나 존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기, 준비하지 않기'가 인도여행의 준비였다고 썼다. 당신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빈 몸으로 여행을 떠났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시대엔 굉장히 무모한 일이다.

"정보가 많을수록 불안은 줄어들지만 실상은 멀어진다. 낯선 곳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가이드북은 일종의 보험이다. 결국 그건 남의 체험을 따라 하는 여행일 뿐이다. 거기에 '놀라움'은 수반되지 않는다."

―인도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인도에 대한 세상의 해석이 어그러졌다고 비판했더라. 명상, 기행, 요가 등 신비를 팔아먹는 행위를 사기라고 썼다.

"인도의 위험성은 신비주의에 있다. 히말라야 앞에서 좌선하는데 눈앞에 에너지가 용솟음치더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다. 수증기의 상승기류였을 뿐인데. 갑자기 머리 위에 장미꽃이 피었다는 사람도 있다. 힘든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거지. 경계할 일이다."

―'인도방랑' 이후 인도에 간 적이 있는가.

"지난 1월에. 거의 40년 만에 간 셈이다. IT는 첨단으로 발전했는데 서민 생활은 변함이 없더라. 젊은이들의 신앙심도 상당히 쇠퇴해 있었다. 한국 여행자들이 많아서 매우 놀랐다. 좋은 현상이다."

―일본 여행자들 수만 하겠는가.

"일본 젊은이들은 내향적이 되어서 좀처럼 여행을 하지 않는다. 병적으로 집 안에 처박혀 타인과 섞이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경향이 남성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게 문제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을 거다."

―당신은 왜 여행을하는가.

"지기 위해, 좌절을 맛보기 위해. 사막에서 만난 이슬람의 젊은이가 내게 물었다. '너희 나라의 부처는 왜 웃고 있느냐'고. '종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 청년이 비웃었다. '불교가 굉장히 지쳐 있군!' 그들에게 종교는 생존이 걸린 치열한 삶이자 투쟁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 매일매일 부서지고 새로워진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1970년대 중반엔 한국을 여행했다.

"당시 찍은 사진들을 보면 현재의 엄청난 변화에 놀라게 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상실된 것들이 보인다."

―기억에 남는 곳이 있나.

"기차를 타고 가다 본 봉양(제천). 마을 이름,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88올림픽 때 다시 한국을 찾았고 봉양에 갔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돼 있더라."

―70년대 한국을 외국인 혼자서 여행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TV 방송이 끝날 무렵 애국가와 함께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던 '박통'의 무서운 얼굴을 잊을 수 없다.(웃음) 시골에 가면 가죽점퍼를 입은 형사들이 여관을 찾아와 내 짐을 다 뒤지고 검사하더라. 농부들은 친절했다. 어느 벽촌 농가에서 여인들이 김치를 담고 있기에 사진을 찍었더니 점심을 먹고 가란다. 툇마루, 밥상 위에 놓여 있던 따뜻한 밥, 김치, 숭늉…. 천상의 맛이었다. 당신도 그런 '진짜 김치'를 먹어본 적 있는가."


"기쁨보다 슬픔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훨씬 강하다. 타인에 대한 한없는 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사진과 감성적 글쓰기를 통해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일본사회를 위로하고 있다. / 후지와라 신야 제공
100만명의 생각, 1명의 생각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편의점이 없었다. 과자가게에 가면 주인아주머니가 눈깔사탕 하나는 덤으로 넣어주었고, 심부름으로 무 하나를 사러 가면 본 적도 없는 아저씨가 무를 건네주며 "꼬마야, 무 많이 먹고 얼른 커라" 하고 격려해주었다. 이제 마을에는 사람들의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본 어디를 가도 쇼핑몰과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과 자동판매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물건을 사고팔 때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왼쪽 눈으로 보는 세상
왼쪽과 오른쪽 눈…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
보고 싶은 것보다… 보이는 것을 찍는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중에서

―최근 펴낸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는 '인간의 냉동화'로 함축되는 문명 비판인 동시에 상처받은 영혼들의 치유서로 읽힌다.

"극한의 경쟁사회에서 '인간의 마음'을 찾아보고 싶었다. 얼핏 보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삶의 진실이 있다."

―당신의 사진은 '현실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담아낸다'고 평가받는다.

"사진에는 두 가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있다. 보고 싶은 것을 찍을 것인가, 보이는 것을 찍을 것인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과 상대를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문제는 존재감이다. 자기가 의도한 이미지대로 찍은 사진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지만 존재감, 진정성은 생기지 않는다."

―오른쪽 눈을 사용하도록 설계돼 있는 카메라를 왼쪽 눈으로 찍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우뇌와 좌뇌의 기능이 다르듯,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

―최근에는 '서예 퍼포먼스'로 사회적 발언을 하더라. 지난해 상하이 엑스포에서는 '만세일야몽여(萬世一夜夢如)'라는 붓글씨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다.

"붓글씨는 목소리와 같다. 젊은 여인이 '꽃'하고 발음하는 것과 내가 '꽃' 하고 내뱉는 것은 듣는 이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상하이에서는 '인간이 자랑하는 최첨단 과학기술도 한밤의 꿈과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정신의 성숙이 필요한 때다."

―삶에 대한 당신의 통찰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100만명이 생각하는 것과 1명이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리고 100만명과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어떤 직장여성이 갑작스러운 도로공사로 인해 8년을 한결같이 다니던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우회한다. 거기서 그녀는 동백꽃이 주단처럼 깔린 풍경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 시선을 옮기기만 해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만난다. 나는 소고기덮밥 집에 갈 때에도 냉장고에 들어 있는 락교와 달걀을 가져간다. 주인의 소고기덮밥을 그대로 먹는 사람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먹는 사람의 관점은 다르지 않을까."

―'여자와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면 오랜 여행을 할 수 없다'고 썼더라.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처음에 태어난 것, 그리고 최후까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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