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일요일

Scotland, 결코 꺾이지 않을 자유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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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라! 밤이 내리면                    Hark when the night is falling
들리는 파이프 소리                     Hear the pipes are calling
우렁차고 자랑스럽게                   Loudly and proudly calling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Down thro‘ the glen
산들이 잠든 그 곳에                    There where the hills are sleeping
피가 용솟움친다                          Now feel the blood a-leaping
그 옛날 하이랜드인의 기상만큼이나 드높이        High as the spirits of the old highland men



귀에 익숙한 백파이프 연주곡으로 “Scotland the Brave”를 들으며 때로는 장중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흐르는 선율 속에 가득 담겨있는 자부심과 자기의 땅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워온 스코틀랜드인의 힘찬 심장 박동을 느낀다. 문자 그대로 높은 지대의 땅인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Highland) 산하를 마치 스코트족의 게릴라가 된 양 웃통을 벗고 뛰어다니며 나는 과연 무엇이 이 곳을 그렇게 죽여도 죽지 않는 자유의 땅으로 만들었는지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자유!“에의 외침이 내 속에서도 터져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만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정신에 동화되면서 잉글랜드인에 대한 증오를 덩달아 갖게 되었고 의식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영국으로부터 구별하여 부르는 습관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번 유럽스케치(2000년 3월)에서 영국을 ‘담백한 맛의 따로국밥’으로 그리며 스코틀랜드를 영국을 구성하는 일원으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결례를 범하여 영 미안했었다. 이제라도 제대로 그 격에 맞는 예우를 해줌으로써 스코틀랜드에 대한 나의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고싶다.



존 슬레이스(John Sleith), 12년전 그를 만나기 전까지 사실 나에게 있어서도 영국은 잉글랜드였고,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북쪽지방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하였다.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얇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이 인상적이던 그는 ‘환경담당검사(environmental prosecutor)’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업을 가진 중년신사였다. 환경을 훼손하는 사범들을 적발하여 기소하고 중형을 때리는 일을 하는 그가 한국에 휴가와서 한 일 역시 ‘환경미화’와 관련된 일이었다. 한 국제행사에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참가한 그는 청소를 맡았던 모양인데 옥외샤워장의 배수구에 쌓인 오물들을 손으로 집어내다가 나와 마주쳤다. 그는 마침 내가 소년시절부터 유일하게 3번이나 읽은 위인전기의 주인공인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고향 근처에서 온 스코틀랜드인이었고 우리는 리빙스턴 이야기로 쉽게 친해졌다. 그와의 만남은 진정한 스코틀랜드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스코틀랜드 민족당(Scottish National Party)’의 열혈당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답게 매사에 철두철미한 스코트인으로 살았다. 정치적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직접 만난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원이라고 해야 선거유세장이나 따라다니는 일용직 근로자이거나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무슨 부스러기라도 없나 기웃거리는 한량 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나에게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한 건강한 시민이 정치적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당비를 내며 참여하는 진성당원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주권독립을 하여도 더 잘 살 수 있는 이유 몇가지를 들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북해 유전을 꼽았다. 북해의 해저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 및 유전을 보유하고 있는 스코틀랜드는 런던 중앙정부의 재원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면서도 정작 누리는 혜택은 없다는 것이었다. ‘남(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영원한 남이다) 좋은 일’ 시키느니 차라리 독립하여 우리라도 잘 먹고 잘 살자는 논지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스코틀랜드는 원래 잉글랜드 놈들과는 종자도 사는 곳도 다른 별개의 나라였고 또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입증되었듯이 따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바램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 4년 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보수당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이 제 1당으로, 영국 전체에서는 親스코틀랜드적인 노동당이 집권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우리는 함께 축배를 들었고 그 뒤 스코틀랜드의 독립의회가 다시 에딘버러에 설치되는 모습도 감격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외교, 국방, 조세 등 핵심 권력은 여전히 중앙정부의 손아귀에 들어있지만 완전한 독립을 향한 스코틀랜드의 행보에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 누구의 지배도 받아들이지 않는 스코트족 특유의 저항정신은 조상 대대로 피를 타고 내려와 진정한 스코트인이라면 누구나 정치적으로야 어떻든 정신적으로는 늘 자유로우며 또 그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고 목숨 걸고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청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X자로 그어져있는 스코틀랜드의 국기인 세인트 앤드류기를 나는 “자유를 속박하는 모든 것에 대한 No!”라고 해석한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왈라스(William Wallace)의 생애를 그린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 Heart)’가 서울에서 개봉되었을 때 영화광이던 나는 한 눈에 또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했다. 유럽보다도 2개월이나 앞서서 개봉된 이 영화를 보러가던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여 원수 잉글랜드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면서도 결코 ‘자비’를 구걸하지 않은 왈라스는 오히려 “자유!”를 당당하게 외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다음회 상영분까지 한번 더 보고서야 극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2개월 뒤 나는 윌리엄 왈라스의 혼이 서려있는 그 땅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때마침 스털링성에는 이 역사적인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왈라스 역을 맡았던 멜깁슨도 방문중이었고 그래서 더욱 더 흥분된 마음으로 격전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왈라스 기념탑에 올라 내려다보니 스코틀랜드를 고지대(Highland)와 저지대(Lowland)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포스(Forth)강이 흐르고 700년전 왈라스가 민병을 일으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군대와 혈전을 벌였던 평원이 펼쳐졌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내려다보는 고색창연한 스털링 요새의 위용도 한 눈에 들어왔고,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적들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동족들을 일깨우는 왈라스의 포효가 가슴 벅차게 들려오는 듯 했다.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전투에서 일어난 이 기적같은 승리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Battle of Stirling Bridge’라고 하여 모든 스코틀랜드인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귀족 출신도 아닌 무명 기사집안 출신의 왈라스가 오합지졸과도 같던 스코트족 및 잡다한 외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이끌고 당시 가장 잘 조직되고 훈련된 기병대로 위세를 떨치던 에드워드의 군대를 전멸시킨 이 승리 이후 스코틀랜드의 기세는 잉글랜드 깊숙히 요크까지 침공할 정도로 드높았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진짜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었으니 왈라스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추대되고 기사 작위를 받는 등 모든 스코트족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이를 시기한 이른바 정통 귀족들의 배반으로 적에게 넘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왈라스는 진정한 스코틀랜드의 영웅으로 더욱 추앙받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모든 스코트인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에 대한 거부감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Sons of Scotland, I am William Wallace.
Yes, I've heard. Kills men by the hundreds,
and if he were here he'd consume the English
with fireballs from his eyes and bolts of lightning from his arse.

I AM William Wallace.
And I see a whole army of my countrymen here in defiance of tyranny.
You have come to fight as free men, and free men you are.
What would you do without freedom? Will you fight?

Aye, fight and you may die.
Run and you'll live -- at least a while.
And dying in your beds many years from now,
would you be willing to trade all the days from this day to that for one chance,
just one chance to come back here and tell our enemies that they may take our lives,
but they'll never take our freedom!!!

Alba gu bra! (Scotland forever!)

스코틀랜드의 아들들아 들으라!
나는 윌리엄 왈라스다.
그렇다. 나도 들었노니 내가 수백명을 죽였고
내가 있다면 내 눈에서 불덩어리가 나가고 엉덩이에서 번개가 나가서
잉글랜드 놈들을 싸그리 없애버릴 수 있으리라고...

내가 바로 그 윌리엄 왈라스다.
여기 잉글랜드의 압제자에 대항하여 일어난 내 스코틀랜드의 온 군대가 모였도다.
그대들은 자유인으로서 싸우러 왔도다. 그대들은 자유인이다.
그대들에게 자유가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싸우겠는가?

그렇다. 싸워라 그러면 죽을 것이다.
도망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얼마동안은...
지금으로부터 수년 뒤 침상에 누워 죽어가겠지.
그대들은 그렇게 목숨을 부지할 날들과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바꾸겠는가?
우리의 원수들에게 그들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지언정
결코 우리의 자유를 앗아갈 수 없으리란 것 말해줄 수 있는 이 단 한번의 기회를!

스코틀랜드여 영원하라!!!

‘통곡의 계곡’이라 불리는 글렌코(Glencoe) 근처에 있는 존의 친구인 턱수염 아저씨 집에 1주일 정도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가 기타를 튕기며 들려주는 ‘Glencoe Song’의 멜로디에 취해 하이랜드의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한 없이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가사의 내용을 알게 되자 스코트인이 사는 땅은 어디나 스코트인의 피가 뿌려져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되었다. 1692년 2월 어느 눈보라가 몰아치던 밤 글렌코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던 맥도날드(MacDonald) 부족은 뜻하지 않던 손님들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은 맥도날드 가문을 없애버리라는 왕(윌리엄 3세)의 명령을 받은 야심만만한 캠벨(Campbell) 부족이 불쑥 들이닥친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맥도날드 가문의 환대는 무참한 살육으로 끝나고 그 추운 밤의 계곡은 억울한 주검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얼어붙었다. “오, 글렌코를 휩쓰는 잔인한 눈발이여! 도날드 가문의 무덤들을 덮었구나. 글렌코를 유린한 원수들의 잔인함이여! 맥도날드 가문을 살육하였구나!”로 시작되는 노래는 그 밤의 학살현장을 낱낱이 고발하는 내용으로 4절까지 이어지는데,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인의 자유와 저항정신이 이 노래를 통하여 계속 고취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뒤져보면 거의 전쟁사라는 것을 알게된다. 또한 스코트의 민족정신이란 다름 아닌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애라는 것도... 어쩌면 이 민족은 그렇게도 줄기차게 싸우며 살아왔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피를 이토록 뜨겁게 덥히는 것일까? 원래 이 땅의 주인은 픽트족(the Picts)으로 이베리아 반도 쪽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뒤를 이어 대륙에서 건너온 켈트족(the Celts)은 호전적인 유목민으로 워낙 거칠고 피튀기는 싸움에 능한 족속으로 당장에 브리튼섬(Britain)과 아일랜드(Ireland)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켈트족의 계보라는 것이 어찌나 복잡하던지 인류학자들조차도 기호를 써서 Q-켈트족은 스코트족과 아이리쉬를, P-켈트족은 웨일즈어를 썼다는 식으로 구별하며, 이들이 누구의 침략을 받아 어떻게 되었고 하는 식으로 얽히고 설켜간다. 아무튼 오늘날의 북아일랜드 지역을 차지하고 살던 켈트족의 일파인 스코트족이 바다 건너 픽트족이 터잡고 살던 땅으로 밀고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의 일이라고 한다. 1세기 경부터 브리튼섬을 공략하기 시작했던 로마군대의 기록에 의하면 완강하게 저항하던 픽트족의 일파인 칼레도니 부족의 이름을 따서 그 땅을 칼레도니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픽트족도 만만치 않은 싸움꾼이었던 같은데, 굴러들어온 돌인 스코트족에 의해 밀려나가기 시작해서 843년 케네쓰 맥알핀(Kenneth MacAl- pin)에 의해 스코트족이 픽트족을 완전히 흡수 통합해버린 후에는 칼레도니아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스코트족의 땅, 즉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당시의 로마의 군대가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 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쌓은 성벽이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경계가 되었다.

싸움으로 얻어낸 땅은 싸움으로 지킬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로마인들조차 고개를 내저으면서 포기하고 떠났던 스코트족의 땅에 이번엔 더 강력한 외적 바이킹족들이 넘보기 시작한다. 맥알핀의 통일 이후로 약 2세기 동안 스코틀랜드는 전쟁과 권력투쟁의 소용돌이로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한때 바이킹족의 일파인 데인족(the Danes)이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우고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거의 다 점령해나가고 있었을 때 오직 한 요새만 남겨두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거센 스코트족의 저항에 부딪친 데인족들은 야간기습으로 전략을 바꾸어 스코트족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모든 병사들이 맨발로 요새에 접근하였는데, 거의 다 접근하였을 때 즈음에 스코틀랜드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가시 투성이의 엉겅퀴를 밟은 한 병사가 내지른 “아얏!” 한 마디에 들통나 모든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고 맹렬한 반격에 오히려 궤멸되어버렸다고 한다. 이 때 이후로 지금까지 가시투성이의 엉겅퀴는 나라를 구한 꽃이라 하여 스코틀랜드의 국화로 사랑받고 있다. 이 세계 어느나라의 국화가 스코틀랜드의 엉겅퀴처럼 가시투성이의 모습을 하고있을까? 어렵게 싸워서 지켜낸 자유이기에 마냥 곱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을 것이고, 거치른 땅에서도 잘 살아가는 강인한 생명력의 엉겅퀴보다 더 스코틀랜드인의 삶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꽃은 없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인의 애창곡 중에 ‘Flower of Scotland’는 엉겅퀴에 투영된 용감한 스코트족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오, 스코틀랜드의 꽃이여!
너와 같은 것을 언제 다시 만날까
네 작은 산들과 골짜기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꽃이여
거만한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서 싸워 물리쳐낸 꽃이여...!

하여간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스코틀랜드인이 가장 증오하는 적(=잉글랜드)의 상징으로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삼국지의 조조에 비견될만한 탁월한 지략가였던 에드워드는 더구나 그의 교활한 술책으로 스코틀랜드의 기득권층을 매수하여 스코트의 민족영웅 윌리엄 왈라스까지 처형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으니 스코틀랜드의 입장에서는 악의 대명사로 불리울만 하다. 또한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였을 때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상징하는 보물이었던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을 빼앗아갔었다. 이 돌은 영국 왕실의 ‘대관식의 돌’로 사용되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보관되어 오다가 700년이 지난 1996년 11월 30일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에딘버러성에 국보로 보관되어 있다. 이 돌이 반환되던 날 스코틀랜드인들은 감격 속에 ‘스코틀랜드의 꽃’을 합창하며 에드워드의 망령을 영원히 떨쳐버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 돌은 구약성경(창세기 28장)의 야곱이 광야에서 베고 자던 돌로 믿어지는데, 여차여차하여 스코틀랜드까지 건너오게 되었고, 숲속의 참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숭배하던 이교도들이던 스코트족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로 스코틀랜드의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할 때면 그 돌을 보좌 아래 두어 신성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돌을 빼앗긴 스코틀랜드인의 끈질긴 요구가 700년만에 관철된 것이다.

에딘버러성에 보존되어있는 '운명의 돌'은 스코틀랜드 주권의 상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1951년에 용감한 스코틀랜드의 학생들이 웨스트민스터에 보관되어있던 이 ‘운명의 돌’를 되찾아서 에딘버러로 돌아와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는데, 경찰당국이 학생들을 체포했지만 절도죄를 물을 수 없어서 석방시켰다 한다. 영국왕실이라고 해서 딱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 역시 훔쳐온 물건이었으므로... 그 ‘운명의 돌’이 반환된 뒤에 직접 에딘버러 성에 가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별 특별한 느낌은 없는 육중한 돌덩어리에 불과했고 야곱이 베고 자기에는 너무 높아서 목뼈가 좀 아프지 않았겠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을뿐이다. 한 스코틀랜드의 독설가는 “에드워드 이래로 700년 동안이나 우리를 기만하며 우리 주권의 상징인 ‘운명의 돌’을 돌려주지 않던 잉글랜드가 돌려준 것이 과연 진품이겠는가?”하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돌 자체의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스코틀랜드인의 민족정신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국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털이 무성한 하일랜드의 소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점잖은 풍채에 멋진 자태가 제법이다.

스코틀랜드의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킬트(Kilt)라 불리는 스커트를 입었는데 그 문양으로 어떤 가문 출신인지를 구별하였다. 그 문양은 타탄(Tartan)이라고 하는 격자무늬로 붉은 색과 검은 색, 청색, 녹색 등의 줄이 가로, 세로로 교차하며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가는데 최대 18,000여가지까지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눈에 익숙한 타탄은 약 100여가지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나는 왈라스 가문의 붉은 색과 검은 줄이 교차하는 타탄을 가장 좋아한다. 정통 스코틀랜드인은 킬트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정말로 그런지 존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을 뿐 끝까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스코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킬트 속에 아무 것도 안입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영국의 한 TV 광고 중에 버터를 사러 온 한 아가씨가 킬트를 입은 주인 아저씨에게 선반 꼭대기에 있는 제품을 꺼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아저씨의 밑을 힐끗 쳐다보는 아가씨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또한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는 잉글랜드 군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스코트족들이 저마다 킬트를 걷어올리고 적에게 엉덩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분명히 아무도 속옷을 내리고 하는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엉덩이에 화살이 꽂힌 자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생수의 이름도 ‘Scottish Pride’이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스코클랜드의  자부심을 마시며 산다. 위스키의 어원은 본래 스코트족 고유어로 ‘생명의 물’을 뜻하는 ‘우스게바(Usquebaugh)’에서 나왔다고 한다. 하이랜드의 골짜기마다 흐르는 이 맑은 물은 수만년 전의 모습이나 지금이나 태초의 자연상태 그대로이고 그것을 마시며 용감하고 씩씩한 스코트족들이 살고있다. 검은빛 네스호에서 목격되었다는 괴물이 현존하고 있는 마지막 공룡이라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엉겅퀴처럼 강인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스코트족의 정신이 살아있는 이 땅을 침범한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자부심 만큼이나 높이 아있는 에딘버러성은 천혜의 요새이자 가장 아름다운 유럽의 고성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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